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3:7)

2019.4.14(주일오전)예수의 고난에 동참함이 복이 있다(계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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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고난에 동참함이 복이 있다(1:9)

 

우리는 한해를 분주하게 살면서 주님이 자신을 위해 피 흘리신 예수님 십자가의 공로를 잊고 살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야 하겠다.

 

1)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53:4~5, 27:45~46)

이사야 53장 전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예언을 하였는데, 특별히 4절과 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말씀하신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평안과 화평과 자유함과 허물과 죄에서 용서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역사이다.

가시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우고 꽉 누를 때 그 가시가 살을 파고 들어가는 아픔, 양손과 양발에는 대못(아래는 가늘고 위로 갈수록 굵은 못)이 박히는 고통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이지만, 아래부터 위로 올라가며 넓어지는 대못이 손과 발에 박힐 때 점점 뼈와 뼈 사이를 뚫고 들어갈 때 아픔과 고통 고난을 생각해보라!

또 십자가에 못 박아 일으켜 세울 때 예수님 몸이 박힌 못에 의지하여 매달리는 고통을 받으셨다.

그 뿐 아니라 로마 군병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를 때 물과 피를 다 쏟아내신 그 십자가. 그 예수님의 고난이 우리의 허물과 죄악으로 인함이요, 우리는 그 십자가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어도 또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6:4~6에서는 또 범죄 하는 것은 예수님을 두 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죄 사함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이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두 번 못 박는 범죄자가 나오지 않아야 하겠다.

9:12~14 황소의 피나 염소의 피로 우리의 죄를 사함 받지 못하고 보배로운 어린양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룰 수 있다고 말씀했고, 1:5은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다고 말씀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의 결과로 우리는 자유함과 평안함을 얻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평안함을 얻어서 더 범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난주간과 부활주일이 있는 4월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특별히 생각하며 입으로 마음으로 몸으로 생활로 다시는 범죄 하지 않는 삶을 우리 모두 살아야 하겠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끌고 왔을 때, 예수님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한마디에 누구도 돌로 치는 자가 없었으니 누구라도 죄로부터 자유한 사람은 없는 것이다.

오직 자유 함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공로 십자가인 것이다.

오랫동안 예수님을 믿고 오면서 또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죄에 대한 의식과 죄에 대한 인식이 흐려지지는 않았는지. 어쩌면 그것이 죄에 대한 의식과 인식을 더 가져다주지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우리는 더욱더 예수님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십자가의 공로가 의미 없어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하였다.

 

2)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한 순교자들(6:9~11)

첫 순교자 아벨에서부터 우리 시대까지 순교자라 함은 주를 위해 복음을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을 말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따라오려거든 네 몫에 대인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하셨고, 그 말씀대로 제자들은 다 십자가를 지고 실제로 순교하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다.

우리 또한 예수그리스도를 바로 따라가려면 반드시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정적인 십자가, 개인적인 십자가라 표현한다.

순교자들은 자기의 가정이나 가족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지나간 역사를 돌아볼 때 순교자는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간 순교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으며, 예수님으로 인하여 핍박받고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움으로 삼았기에 순교할 수 있었다.

11:35 그들이 악형을 받되 더 좋은 부활을 얻는다는 말씀은 계20:4~6에 첫째 부활로 살아나는 것을 말씀한다. 순교자는 하나님의 인 맞은 종과 함께 살아나서 주의 재림을 맞이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이루어질 때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과 제사장으로 참여하니 순교자에게 돌아가는 축복이 크다 하겠다.

그 축복이 순교자에 대한 최고의 대우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한 순교자, 순교자에 대한 얘기를 계6:9~11에서 유일하게 말씀하고 있다.

 

3)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사도요한(1:9)

사도요한은 본문에 자신은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했으므로, 그 나라에도 동참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하고 있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증거로 밧모섬에 와 있다고 고백한다.

그렇다면 사도요한은 예수의 환난에 어떤 동참을 하였는가?

19:25~27 예수님이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사하시고 오 천명이 먹고도 12광주리가 남는 기적을 나타내실 때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막상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신 곳에는 아무도 오지 않았고, 제자들마저도 겁이 나서 멀찌감치 따라왔다고 성경은 기록했다.

십자가 밑에 따라간 사람은 두 여인과 사랑하는 제자라고 말씀해 놓고, 요한복음 21장에 와서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저 사랑하는 제자는 어찌 되겠습니까’? 물은 그 사랑하는 제자가 사도요한을 말한 것이다.

제자 중에 가장 연소한 것으로 알려진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날 밤 만찬석에서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하실 때 제자들이 심히 근심하여 여짜오되 내니이까?하며 예수님을 팔 가능성을 보였는데, 사도요한은 뉘시오니까? 여쭈며 전혀 예수님을 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다.

그런 사도요한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가 예수님의 유언을 받고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날부터 집에 모셨더라 하였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마지막 운명하시는 것을 지켜보면서, 고통받는 예수님을 위해 아무것도 해드릴 수 없을 때 그 슬픔이 얼마나 컸겠는가.

사도요한은 계1:9에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그날 예수님의 환난에 자신이 동참했고, 그 하나님의 말씀과 증거를 전하다 밧모섬까지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요한계시록을 깨닫고 읽고·듣고·지키는 복 있는 사람은 나 요한의 형제가 되어서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동참하는 그 사람이 계11:15 같은 그 나라(그리스도의 나라)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가? 깊이 생각하고 돌아보아야 하겠다.

지금 당장 백지 한 장을 주면서 예수님의 환난과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지 써 내려 가보라고 한다면 과연 우리는 몇 가지를 쓸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의 고통과 아픔을 담당하셨는데, 우리는 과연 그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고난에 얼마나 동참을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할 때 그 아픔과 슬픔은 컸지만, 밧모섬에 오신 예수님을 만남으로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 요한계시록을 기록하는 하나님의 영광과 큰 축복을 받게 되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기보다는 오히려 예수님의 이름으로 대접받고, 사랑받고, 영광을 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사도요한과 같이 주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 있다면, 반드시 갚아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로 복이 있을 줄 믿는다.

 

4)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14:13)

사도요한은 계1:9에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것을 고백하고, 7:1~4에 앞으로 등장할 하나님의 인 맞을 종 144천에 예수의 환난에 동참할 것을 예시하고 있다.

인 맞은 종들이 계14:3 산 순교함으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순교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6:9~11 육체가 죽는 순교가 있고,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 속에 육체의 소욕(인간성, 죄악성)을 죽이는 산 순교가 있다. 그래서 산 순교는 죽은 자라 하지 않고 주안에서 죽는 자라고 표현했다.

하나님의 인 맞은 종 144천은 육체는 살아있지만, 그 속에 있는 육체의 소욕 인간성 죄악성을 죽이기 위해 예수의 환난에 동참하니 산 순교며 이 또한 순교와 방불케 하는 역사인 것이다.

이와 같이 계1:9에서 사도요한의 형제가 되는 사람은 계14:3같이 산 순교 할 것을 말씀해 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선지서와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말씀을 읽고·듣고·지키면서 얼마나 산 순교자의 길을 가고 있는가? 생각해 볼 때다.

누군가는 될일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위해 사는 사람은 복음으로 인해 오는 고통이나 어려운 일들을 감수해야 한다.

순교자와 인 맞은 종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예수의 환난과 고난에 동참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참하는 그들에게 계11:15 그리스도의 나라 천년왕국에 들어가 왕과 제사장으로 천년을 살게 된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겪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나사렛 이단이란 소리를 들어도 그 사람들을 찾아가 따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좋아하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두란노서원에 모여서 온종일 예수그리스도를 전파했다.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사명이 있어 지중해 연안에 있는 밧모섬에 가서 범죄자 가운데 있었어도 우울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고난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실 때 그에게 어떤 축복이 왔는가?

요한계시록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비밀을 기록하는 축복을 주셨고, 그리스도의 나라에 들어가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과 제사장이 되는 축복을 주셨다. 그리고 그는 계시록을 마감하면서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고백을 하며 요한계시록을 마감할 수 있었던 사도요한은 얼마나 기뻤겠는가.

, 전 세계 사람이 구원받으려면 예수 이름 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게 되었다.

4:10~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어떤 죄악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로 말미암지 않고는 회개할 수도 죄 사함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세례받고, 축복하고, 귀신을 쫓아내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고 구원을 받는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 온 은혜와 축복은 오직 그 이름 예수님인 것이다.

사도요한 같이 예수님의 환난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인 맞은 종들이 믿음의 시련을 겪고 복음을 위해 고난과 슬픔과 탄식, 그리고 환경이 열악해도 그것을 넘어서서 이기고 나오는 종들에게 주시는 축복이 있으니, 두 증인의 권세다. 두 증인의 권세를 받아 두려움 없이 앞으로 전 세계에 다시예언할 때, 7:9~14같이 능히 셀 수 없는 흰옷 입은 무리가 구원받아 나오게 하시니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함이 복이 있다!

선지서와 요한계시록 영원한 복음, 될일의 말씀을 전국에 전하고 하나님의 인 맞은 종 144천이 나오기까지 사명을 감당함에 있어 어떤 고난이라도 감당할만한 사상을 주시는데, 곧 백마의 사상이다.

하나님의 인 맞을 종들에게는 백마의 사상, 즉 영원한복음(14:6)의 절대성이 확고해져서 무엇인가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마지막 복음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상으로 우리를 주관해 주시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받았던 고통보다도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고, 온전한 주일을 바로 지키지 못하고 오전예배만 드리고 돌아가는 이들을 볼 때 십자가의 고통보다 더 아파하시지 않겠는가.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셨지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 죽고자 하면 살게 된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살고자 하면 결국 죽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드려서 우리를 죄 가운데 건져내신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되겠다.

그러므로 예수의 환난에 동참한 인 맞은 종들에게 두 증인의 권세로, 그리스도의 나라에 왕과 제사장이 되게 하시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 환난에 동참한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공의다.

결론 하나님의 공의가 시행되는 축복이다(살후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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