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여 자유함을 주신다. (갈5:16-24)
본문의 말씀같이 우리의 삶 속에서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 사느냐 성령의 소욕을 따라서 사느냐에 따라서 자유함이 결정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그리스도 한 분을 제외하고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육체의 소욕이 없을 수는 없다.
1) 성령의 소욕이 살아나게 하셔서 자유함을 주신다. (갈5:16-17)
요3:3-5절같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을 체험한 사람에게는 성령의 소욕이 생겨나고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함께 가지게 된다.
갈라디아서에서도 육체의 소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였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근거로 본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천년왕국을 말씀한 것이다.
고전15:50절에서는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갈라디아서와 고린도서의 저자는 모두 사도 바울이니 혈과 육, 육체의 소욕은 같은 말씀이다.
이 말씀들은 예수 믿고 죽어서 영혼이 음부에 가는 사람들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 육체가 살아서 천년왕국에 들어갈 사람들에 대한 말씀이기에 우리가 천년왕국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육체의 소욕이 죽어져야 한다.
육체의 소욕은 우리가 죽이고자 하여 죽어지는 것이 아니지만 계속해서 성령의 소욕이 살아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전5:19절같이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으로 충만해지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반반일 때 가장 갈등이 심화된다.
성령의 소욕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고 예배를 드리는 환경에서 성령의 감동, 성령의 역사, 성령의 충만할 때 살아나게 된다.
만약 주일날에만 성령의 소욕이 살아날 수 있는 온전한 시간을 가진다면 육일 동안은 육체의 소욕이 살아나게 되는 시간을 가지게 되는 것이기에 육체의 소욕이 더 강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온전한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새벽기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육체의 소욕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사대욕구인데 식욕, 성욕, 정욕, 물욕이다.
이것을 다 버리고 초월한 체질이 변화체질이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나 고린도서 등에서 육체의 소욕을 버리고 살아야 함을 강조하였고 그 뒤에 하나님의 나라를 거론했으니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육체의 소욕을 반드시 버려야 한다.
엘리 제사장이 패망한 것은 자신의 자녀에게 엄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도 신령한 영의 생활을 하는 종들일 수록 자신의 자녀, 자신의 가족에게 엄격해야 한다.
2) 성령의 열매를 맺으므로 자유함을 주신다. (갈5:22-24)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며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하였다.
우리가 이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생활화해서 아홉 가지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성령의 감동을 받는다, 성령의 역사를 받는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는다 에서 한 차원 더 높아지는 것은 성령의 소욕으로 열매를 맺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생활화해야 한다.
그럴 때에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게 되는 것이다.
3)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유함을 주신다. (갈5:24)
육체, 즉 육체의 소욕과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한다면 영원히 정과 욕심에서 자유함을 받을 수 없지만 말씀이 있을 때에 그것을 하나님께 시인하고 육체의 소욕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구해야 한다.
자신이 시인하지 않고 아니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역사해 주시지는 않는다.
4)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을 주셔서 자유함을 주신다. (사4:4)
육체의 소욕이 죽어지게 하는 것도,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도, 육체의 소욕과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을 부어주셔야 가능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