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비밀을  그 종 선지자들에게
보이시지 아니하시고는  결코 행하심이 없으시리라 (암3:7)

제162차 [2010/11/8 월 (저녁)  엎드려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계4:10-11)]

▣ 엎드려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계4:10-11)

    많은 교회와 종들이 분별력을 상실하여 물량주의, 혼합주의, 자유주의, 다원주의, 개인주의, 인본주의가 가득하게 되고 선지자 아모스가 예언한대로 여호와의 말씀을 찾으려고 왕래해도 여호와의 말씀을 찾지 못하고, 여호와의 은혜를 받으려고 해도 어떤 성읍에는 비가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비가 내리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분별 있게 살기 위해서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성경 가운데 엎드린 사람들이 있는데 고라가 당을 지어 성막 앞에서 하나님의 종 모세를 성토할 때 모세가 성막 앞에 엎드렸다.
    엘리야 선지자가 삼년 육개월 동안 가물었던 이스라엘 땅에 비를 내리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엎드려 자신의 머리를 무릎사이에 넣고 일곱 번을 기도했으니 삼년 육개월 동안 가물었던 땅에 비가 내렸다.

    계1:18절에 주후95년경에 사도요한이 밧모섬에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고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
    계4:10-11절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이십사 장로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신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찬양했다.
    뜻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엎드릴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이 시대에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기를 원하고 높아지기를 원하지만 성경에서는 곳곳에서 우리에게 엎드리기를 요구하고 있으니 뜻이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엎드릴 때마다 기적이 일어났다.

    인간세상에서 엎드리면 그 사람은 망하는 사람, 짓밟히는 사람이지만
    말씀대로 엎드리는 사람은 엎드리는 역사, 엎드리는 축복, 엎드리는 기적을 받게 된다.


1) 엎드려 낮아진 자세로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사29:1-4)
    성경에서는 복음을 알파적인 복음과 오메가적인 복음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마24:14절같이 천국복음이 알파적인 복음이요
    계14:6절같이 영원한 복음이 오메가적인 복음이다.

    마태복음에서 천국복음으로 알파적인 복음을 시작하신 예수님이
    밧모섬에 있는 사도요한을 찾아와 요한계시록을 영원한 복음으로 기록하게 하시면서 요한계시록 곳곳에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고 하셨다.

    우리가 마음의 자세, 신앙의 자세, 생활의 자세를 낮추어야 하는데 우리가 낮아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영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십사 장로가 보좌에 엎드러져 보좌에 앉으신 삼위일체 하나님 앞에 경배한 것 같이
    우리가 엎드려 낮아진 자세로 말씀을 받고, 복음을 받고, 은혜를 받아야 한다.


    사29:1-4절에 아리엘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한 면이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원 뜻인 예루살렘은 육적인 예루살렘도 있고 영적인 예루살렘도 있고 슥3:1-2절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선택받은 예루살렘도 있다.

    하나님의 사람인 예루살렘을 낮아지게 하고 대적이 예루살렘 성보다 더 높게 대를 쌓아 예루살렘을 공포에 떨게 하고 함락시키려고 하니 예루살렘이 낮아지고 목소리가 나직히 티끌에서 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낮아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낮아지게 하시는데 대적을 강성하게 만들어 낮아지도록 만든다는 것이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며 하나님의 섭리다.

    사면으로 진치고 그 가운데 성막이 있는데 고라가 당을 지어 성막 앞에서 민족의 지도자 모세를 성토하였다.
    이 광경을 사면으로 빙 둘러 히브리민족이 보고 있는 가운데 지도자의 권위가 무너질 위기에 처했지만 모세는 고라와 그 당을 죽이라고 명하지 않고 도리어 성막 앞에 엎드러졌다.
    모세가 성막 앞에 엎드러진 것을 모든 민족이 지켜보고 고라의 당은 더욱 기세가 등등했겠지만 불꽃같은 눈으로 보고 계시던 여호와가 땅 밑이 갈라져 고라의 당을 산채로 삼키도록 하셨다.

    모세는 대적 앞에 굴복하여 엎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린 것이다.
    우리가 사람 앞에 비굴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야 한다.

    고라와 그 당은 여호와가 보낸 것이며 모세라는 지도자가 성격이 급한 것을 아시고 어떻게 하는지 보시기 위하여 역사하신 한 과정이었다.
    모세는 대적이 역사할 때 인간의 생각으로 벌하지 않고 성막 앞에 엎드릴 때 대적은 꺾어지고 승리자가 되었다.
    고라의 당은 출애굽 한 과정에서 희생물이 되었을 뿐이며 모세는 더 위대한 종으로 인정받았을 뿐이다.

    우리가 앞으로 가는 삶 속에서 크고 작은 일을 겪을 때에 결정적인 순간에 하나님의 말씀 앞에, 하나님의 역사 앞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엎드리면 그 사람이 승리자가 되며 위대한 사람이 된다.

    세상은 낮아지면 짓밟히고 죽게 되지만 말씀은 낮아지라고 하였다.
    출애굽 때에 있었던 일은 말세를 만난 우리에게 경계로 거울로 기록한 말씀이라고 하였으니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인간의 생각으로 맞서지 않고 성막 같은 말씀 앞에 엎드러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스스로 낮아질 때는 승리자가 되지만 낮아지지 못하면 하나님이 대적을 강대하게 하셔서 낮아지게 하신다.


2) 엎드려 미약한 자세로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사41:14-15)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물과 생물 가운데 가장 미약한 것이 지렁이인데 지렁이는 가죽도 없고 뼈도 없고 공격수단도, 방어수단도 없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는 말세에 새 타작기계로 쓰실 종을 지렁이같이 미약하게 만드신다고 예언하였다.  

    엘리야는 그 당시에 최고의 선지자지만 그릿시냇가에 도망가서 까마귀가 물어다주는 음식과 시냇물을 마시고, 시냇물이 마르니 사르밧 과부의 집에 도망가 그 집의 다락에서 지냈다.
    그렇게 미약하게 지내다가 갈멜산의 대결을 끝내고 삼년 육개월 동안 가물었던 땅에 비를 내리기 위하여 무릎을 꿇고 무릎사이에 머리를 넣고 일곱 번을 기도하였다.

    먹구름이 하늘에 뜰 때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빗소리가 들리니 궁으로 돌아가라고 말하며 아합 왕의 마차가 출발하면서 엘리야에게는 하늘로 큰 능력이 임하여 허리를 동이고 마차 앞에 달려갔다.

    큰 능력은 자신이 구한다고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 앞에 엎드려 미약한 자세를 가질 때 큰 능력과 초인간적인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3) 엎드려 겸손한 자세로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사57:15)
    사57:15절에 겸손한 자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겸손한 자의 영을 소성케 하여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반대로 엎드려 겸손한 자세를 가지지 않고 교만하면 그 영은 시들게 되는 것이다.
    순종은 겸손에서 나오며 거역은 교만에서 나오기에 순종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교만하거 거만해서 시들고 병들었던 영혼이 엎드려 겸손한 자세를 가지므로 살아나고 소생되어야 한다.

    습2:3절에 공의와 겸손을 구하는 자에게 환난 날에 사는 길을 주신다고 하였고,
    약4:6절에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고,
    벧전5:5-6절에 때가 되면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하나님이 높이신다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 밤낮 겸손한 자세로 이십사 장로같이 찬양, 기도, 감사, 영광을 쉬지 않고 올리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하나님 앞에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 예배를 잘 드리려고 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며 이 사람은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 그 영혼이 살아나고 소생된다.

    엎드러져 겸손해진 사람은 그 증거가 나타나는데 그 사람의 기도가 살아나고, 찬양이 살아나고, 설교가 살아나고, 물질이 하나님께 상달되며 이것이 합하여진 예배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린다.
    겸손한 자의 고백은 "아멘"이다.

    겸손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그 말씀을 겸비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말씀 앞에 복종하는 것이다.
    윤리적인 겸손이 아닌 예수그리스도를 닮는 겸손이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이 이십사 장로에게 면류관을 씌워주고 보좌에 앉혀주었지만 이십사 장로가 보좌에서 스스로 내려와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졌다.


4) 엎드려 자신을 죽이는 자세로 복음 받아 영광 돌리는 종이 되라. (계1:17-20)
    계1장에는 사도요한이 예수님 발 앞에 엎드러졌고
    계4장에는 이십사 장로가 하나님 앞에 엎드러졌다.

    자신이 살아있는 자세로 받은 복음은 복음을 전할 때 복음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 자신의 자아, 자신의 지식과 학문, 인간성, 죄악성이 함께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주님 앞에 죽은 자 같이 되어 엎드러진 모습으로 자신의 것이 전혀 없이 주님의 지시만을 기록한 것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되며 말씀 앞에 겸손한 모습으로 받아야 한다.
    말씀은 하나님인데 그 분의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 말씀을 맞다, 틀리다를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엎드려 사도요한같이 자신을 죽이는 자세로 낮아질 때에 성령의 감동을 주셔서 반드시 속히 될 일의 미래를 환하게 알게 하여 주신다.

    사리사욕,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 비굴하고 위선적이고 거짓된 것이 죽어지고
    미약해지기 위해서 낮아지기 위해서 겸손해지기 위해서 자기 자신이 죽어지기 위해서 엎드러져야 한다.

    엎드려 낮아진 자세를 모세같이 가지고
    엎드려 미약해진 자세를 엘리야같이 가지고
    엎드려 겸손한 자세를 이십사 장로같이 가지고
    엎드려 자신을 죽이는 자세를 사도요한같이 가질 때에
    이들이 받았던 역사와 축복을 우리에게도 주신다.

    자신이 죽어지는 자세로 낮아지는 사도요한에게 주님은 계시록1장부터 22장까지 미래에 되어질 말씀, 인류종말 환난 가운데 사는 방법을 기록하게 하셨다.


결론 : 겸손한 종이 순종하고 복음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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